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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I INTERVIEW


세계의 양궁인, 석동은 활은 나의 인생


MOM&I INTERVIEW


MOM&I INTERVIEW


지난 여름 전세계는 런던올림픽에 열광했다. 각국의 선수들은 자국의 명예를 걸고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움직이기 위해 최 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렇게 승리를 다투고 기록을 경신하는 무대 위 선수들을 위해 화면 밖에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이 들이 있으니, 바로 감독과 코치들이다. 지난 런던올림픽에서 이탈리아는 자국 역사상 최초로 남자 양궁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양궁의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에서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이탈리아 팀에게 2004년 아테네올림픽과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의 영광을 안겨준 지도자가 바로 한국인 석동은 감독이다.


운명과도 같은 양궁, 내겐 가족이 되다 석동은 감독과 양궁의 인연은 하늘이 내려준 운명과도 같다. 그의 부친은 양궁 장비와 기술을 한국에 최초로 보급해 ‘한국 양궁의 어머니’로 불리는 고(故) 석봉근 전 대한양궁협회 고문이다. 양궁 대가의 아들로서 석동은 감독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직접 양궁 기술을 사사 받았고, 덕분에 하루 일과로 또 생활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활을 당기기 시작했다. “아버님께서 체육교사셨는데 양궁 활이랑 교본을 직접 제작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어요. 그러니까 제가 어려서부터 양궁을 접한 건 너무나 당연했죠.” 석동은 감독은 일찍이 선수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73년 전국종합선수권대회에서는 한국 신기록을 5개나 세우며 5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후 올림픽 국가대표선수로도 뽑혔으나 당시 정부가 세운 참가인원 절감 방침으로 올림픽 무대에는 도전하지 못했다. 체육 특기자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생물학과로 진학했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서울시청 양궁팀 감독을 맡아 결혼도 하고 두 아이의 아빠도 되었다. 그렇게 모든 게 평범하게 흘러가는듯싶었다. 그러던 그가 35살이 되었을 때 문득 더 넓은 세계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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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서 세계를 한번 품에 안아보고 싶었다. 1991년, 서울시청 양궁팀 감독직 계약이 끝나갈 무렵, 그의 뜻을 감지한 학교 선배가 이탈리아에서 무역업을 할 것을 제안하였다. 세계를 향한 자신의 꿈과 성악가였던 부인에게 유학의 길이 동시에 주어지는 그 기회를 그는 선뜻 승낙하였다. 그리고 그의 가족은 이탈리아 행 비행기를 탔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석동은 감독과 그의 가족들은 밀라노 근처 바죠(Baggio)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정착하였다. 신기한 것은, 석동은 감독이 가족을 말할 때는 ‘활’도 가족에 속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듣기엔 이상할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다. 활은 그의 가족이고, 그의 그림자이고, 그의 생활이다. 그의 가족과 활은 그렇게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양궁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다 90년대 초 한국인들에게 이탈리아는 머나 먼 유럽의 한 국가였다. 이탈리아인들에게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동양의 생소한 곳이었다. 서로를 잘 모르던 당시 이탈리아로 이민 간 석동은 감독에게 이탈리아를 살갑게 느끼게 된 계기가 있다.


“처음 이탈리아에 오자마자 예방접종 때문에 애들을 데리고 동네 보건소에 갔거든요. 근데 사무를 보시던 아주머니가 이탈리아어를 못하는 우리 가족들을 데리고 보건소 사용절차를 친절하게 도와주셨어요. 예방접종이 끝나고 나오는데 우리를 붙잡고 ‘애들도 있는데 가족 모두가 언어가 부족해서 어떡하냐. 내가 너희 집에 가서 애들한테 이탈리아어를 가르쳐주겠다’고 자진해서 무료수업을 제안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얼떨결에 승낙은 했지만, 그 무료봉사가 얼마나 오래 갈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왠걸요. 그분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한번씩 우리 가족들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쳐줬고, 심지어 본인이 아파서 못 올 때면 딸을 대신 보내서라도 수업을 진행시켰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고맙죠.” 석동은 감독은 이삿짐을 풀자마자 자신의 활을 들고 동네 양궁장으로 갔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양궁장에서 활을 당겼다. 심상치 않은 그의 솜씨를 본 양궁장 회원들이 하나 둘 그에게 다가와 기술을 물어보고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역 양궁협회 회장이 석동은 감독에게 지역 주니어 양궁팀 감독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고 그는 선뜻 승낙했다. 그렇게 주중에는 무역인으로 주말에는 지역 양궁팀 감독으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양궁이 그의 삶이고 그의 그림자이기에 석동은 감독은 주말마다 양궁장에 가서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경기에 참여하는 것이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지침을 받은 선수들이 하나둘씩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전국 단위 경기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어느새 양궁 선수들이나 양궁 클럽들 사이에서는 그에 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석동은 감독은 이탈리아 국립양궁협회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탈리아 양궁협회에서 ‘석동은’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로마에서 만난 이탈리아 양궁협회 회장은 그에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줄 것을 제안했다. “이탈리아 양궁협회 회장이 제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달라는데,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 주말뿐이 활동을 못 하겠다고 얘기했거든요. 그런데도 괜찮다고 무조건 감독직을 맡아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수락했죠.” 선수로 감독으로 활동하던 한국을 떠나 이제는 생활 속에서 소소하게 즐기게 될 줄 알았던 양궁이 어느새 석동은 감독에게 다시 큰 기회로 찾아온 것이다. 그와 이탈리아 양궁 국가대표팀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외국 국가대표팀 감독의 결실, 올림픽 금메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시작하면서 석동은 감독은 이탈리아 국가대표선수들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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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보니까 한국 선수들과 너무 다른 거예요. 한국 선수들은 활을 만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꿈을 꾸거든요. 그런데 이탈리아 선수들은 활을 쏘는 게 재미있어서 쏘는 거예요. 그러니까 활을 쏘는 현재의 즐거움은 있는데 미래에 대한 목표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아, 여기 선수들에게 가장 부족한 건 목표구나’라는 걸 금방 알았지요.”


그는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가장 절실한 건 목표라는 걸 깨닫고 그들에게 목표를 심어줄 지도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영향으로 양궁에 대한 목표 의식이 분명해진 그의 선수들은 곧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했다. 석동은 감독의 역량을 알아본 이탈리아 양궁협회에서는 그에게 2004년 그리스 아테네올림픽 국가대표팀도 맡아서 지도해줄 것을 부탁했고,


소리 없는 몸짓으로 진정한 소통을 꿈꾼다 LDP 무용단 대표, 신창호


연기지망생, Jason Sol 도전이란 이름으로 써 내려가는 나의 삶


평범한 회사원이던 제이슨 씨는 어느 날 자신을 위해 새로운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지금까지 걸치고 있던 회사원의 옷을 벗고, 안정적인 직업이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에서 벗어나 철저히 자신의 내면이 요구하는 인생을 살기로 한 것이다. 삶의 안정을 꿈꾸 는 서른의 나이에 그가 택한 길은 그 어떤 것도 보장해줄 수 없는, 가끔은 외로움도 꿋꿋이 견뎌내야 하는 연기자의 삶이었다. 인 생의 제2막을 위해 ‘도전’이라는 카드를 대범하게 꺼내 들고 성공보다는 나를 위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제이슨 씨. 아직은 아무 도 알아주지 않는 아름다운 도전이지만, 그의 잔잔한 날갯짓이 마치 나비효과와도 같이 거대한 바람으로 소용돌이치게 될 날을 기대하며 그와의 만남을 시작해본다.


한국 이름 설재민의 탄생 펜실베니아의 Chambersburg 에 사시는 큰고모님의 영향으로 처음 미국땅을 밟게 된 제이슨 씨와 그의 가족들은 유색인종을 구경하기 어려운 백인 동네에서 이민 1세대로서의 삶을 개척해왔다. 생김새와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두 자녀가 학교에서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그의 부모님은 자녀가 하루빨리 미국 사회에 적응하길 바라는 마음에 한국 이름 대신 영어 이름을 지어주셨다. 다행히도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제이슨 씨는 축구, 야구, 태권도 할 것 없이 여러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항상 주위에 백인 친구들을 몰고 다녔다. 학창시절 인종차별을 단 한 순간도 느낄 수 없을 만큼 백인사회에서 활발한 교제를 나누던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한국인 친구들과의 만남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한국 이름이 없었다는 사실도 그제야 깨달았죠. 그래서 곧장 부모님께 전화해 한국 이름을 지어달라고 떼를 썼어요. 그리고 불과 몇 년 전에야 설재민이라는 한국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피츠버그 근교의 Indiana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한 그는 대학 졸업 후 여러 나라에 지사를 두고 있는 Cargill에서 근무했다. 부모님에 대한 효심과 자립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그는 8년의 세월을 앞뒤 돌아볼 겨를 없이 오로지 일에만 몰두했고 그러한 그를 친구들과 가족들은 ‘일 중독’이라며 놀려대기도 했다. 주중에는 회사원으로, 주말에는 레스토랑 웨이터로 일하며 남들보다 두 배로 바쁜 삶을 살던 그에게는 당시만해도 편안한 삶에 대한 목표가 있었다. 그렇게 이십 대의 끝자락에 서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힘으로 마련한 집,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보장해 줄 직장, 그곳에서 쌓아 올린


신뢰와 사람 사이의 정까지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모든 보상을 손에 쥐게 되었다. 한가지 목표에만 열중하며 달려온 그였기에 단기간에 원하던 목표를 모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기쁨의 내면에는 열심히 달려온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도 함께 공존했다.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무수한 날을 고민하던 끝에 과감히 회사에 사표를 던지기로 결심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와 연기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저와 누나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저의 꿈보다는 빨리 돈을 벌어서 부모님의 수고를 덜어드릴 수 있는 현실적인 부분에 일찍 눈을 뜨게 되었죠. 그래서 비즈니스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돈 버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했던 저는 심지어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슈퍼에 가서 사온 캔디를 학교 친구들에게 팔아 이윤을 남기기도 했어요.” 그렇게 제이슨 씨는 비즈니스맨에서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연기자로 탈바꿈해 인생의 제2막을 시작했다.


내 삶의 제2막을 열며 배우의 길을 걷기로 한 제이슨 씨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작품이 하나 있다. HBO에서 방영하던 ‘How to make it in America’라는 드라마인데, 두 명의 친한 친구가 뉴욕에서 옷 가게를 운영하며 벌어지는 우여곡절을 코믹하게 그려냈다. 그들이 새로운 곳에서 삶을 개척하며 비즈니스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는 모습이 제이슨 씨의 마음 속에 갇혀 있던 배우라는 희미한 열정의 빛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 작품을 보면서 자신의 터전인 펜실베니아를 떠나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한 제이슨 씨는 그 해 2011년 12월 설레는 마음으로 뉴욕 땅을 밟았다.


“생활비와 집값이 터무니없이 비싼 맨하튼에서 일정한 수입도 없이 살아간다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결정 중 하나였습니다. 처음에는 업타운의 친구 집에 얹혀 지내며 몇 달을 소파에서 잠을 잤어요. 하지만 그래도 뉴욕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이 도시가 주는 에너지와 기회가 저의 가슴을 뛰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시작하는 단계이니 너무 큰 욕심은 내지 않으려고 해요. 우선은 뉴욕에서 경력을 쌓고 나중에 LA로 가는 것이 지금의 계획입니다.”


미국에서 동양인 남자 배우들의 기회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특히나 주역으로 동양인 남자 배우를 발탁하는 경우는 동양적인 문화나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극소수의 작품이 아니고는 드물다. 그래서 동양인 배우들은 뛰어난 연기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늘 조연이나 단역을 맡기 십상이다. 하지만 제이슨 씨는 그러한 상황에 주눅들지 않고 계속해서 기회라는 문을 두드리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려 힘쓴다. 최근에 그가 맡았던 ‘Loyal Pain’의 MMA파이터 역할은 단역임에도 그의 짧은 연기인생 중 가장 비중 있는 역할로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드라마 안에서 자신의 실명, 제이슨 설로 연기하는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몇 달 전에는 로버트 드 니로와 브래들리 쿠퍼가 주연한 ‘Silver lining playbook’에 출연하며 영화 경력도 쌓았다. 드라마 ‘Smash, Person of Interest’에 출연했을 때는 잊지 못할 경험도 했다. 제이슨 씨가 증권 중개인(stock broker)으로 출연했던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영화 ‘Passion of the Christ’에서 예수


매년 가을, 뉴욕의 무용계를 뜨겁게 달구는 “Fall for Dance”는 뉴욕시티센터가 주관하는 무용축제로 세계 정상의 무용작품들을 선별해 무대에 올리는 대단히 뜻 깊은 행사이다. 지난 10월, 올해로 9회째를 맞은 이번 행사에 한국인 무용단으로는 최초로 LDP(Laboratory Dance Project)가 공식 초청돼 가을이 깊어가는 밤, 뉴요커들의 심장을 두드렸다. LDP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생 10명이 주축이 되어 한국의 무용을 국제무대로 이끌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2001년 창단한 남성무용단이다. LDP의 창단멤버이자 현재 LDP 대표를 맡고 있는 신창호 씨는 이번 뉴욕시티센터의 공식초청을 이끌어낸 작품 ‘노코멘트(no comment)’를 창작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을 위해 뉴욕을 방문한 신창호 씨를 만나 그의 춤과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타고 났다. 이번 뉴욕 공연에서도 조명감독이 일정이 맞지 않아 동행하지 못했고, 공연 당일까지 무대 조명디자인을 순서대로 정리한 큐시트마저 공수되지 않았다. 무대에 당연히 준비될 줄 알았던 고무바닥도 보이지 않았고, 총 3일에 걸친 공연을 모두 맨바닥에 온몸을 날리며 치러냈던 참이다. 이런 상황을 보며 관계자들의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도 신창호 씨는 의연했다.


“괜찮아요. 뭐 약간의 문제들은 늘 있기 마련이지만, 어쨌든 공연을 잘했고 관객들 반응도 좋았어요. 가끔 무대에서 관객석으로 불빛이 옮겨갈 때가 있는데 그때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있으면 된 거예요.”


제9회 Fall for Dane 공식 초청작, 노코멘트 뉴욕시티센터가 인정하고 초청한 신창호 단장의 ‘노코멘트’는 침묵의 의미를 8명의 남성무용수들이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해석한 작품으로 2002년 초연됐다. 이후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과 ‘강수진과 친구들’ 등의 국내공연과 축제, 2010년 Kore-A-Moves 선정 및 유럽투어에서 공연되었고, 작년에는 미국 최대의 무용행사인 제이콥스 필로우 무용축제(Jacob’s Pillow Dance Festival)에 초청돼 한국 무용단으로는 처음으로 정식 무대에 서기도 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주립발레단에 공식 레퍼토리로 수출, 국내에서 활동하는 한국 안무가의 작품이 유럽 유수의 직업 발레단에 고정 레퍼토리로 수출되는 첫 사례의 영예까지 국제적으로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아오고 있다. 컴컴한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면 맨손으로 가슴을 치는 신창호 씨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노코멘트’는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2002~3년 한창 이라크전과 9.11 사태로 전세계가 어수선할 당시 저는 독일에 있었어요. 독일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저는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죠.


24 PEOPLE December 2012


그 당시 독일에는 말도, 심지어 음향도 없이 오직 사실 영상만 보도하는 방송이 있었어요. 어느 날 우연히 그 방송을 통해 완전히 폐허가 된 마을 앞에서 한 남자가 얼굴을 감싼 채 가슴을 치며 절규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어요. 폭격 때문인지, 자연재해 때문인지도 모른 채 그저 소리 없이 전달되는 영상 속 남자의 모습에서 표현할 수 없는 강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 방송 프로그램 명이 바로 노코멘트였어요.” 때로는 그 어떤 말보다 소리 없는 움직임이 더 큰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기조에서 ‘노코멘트’가 탄생한 것이다. 비평가들은 시대적 의미가 큰 작품이라 평가해주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의미까지는 없었다며 소년 같은 웃음을 짓는다.


운명 또는 선택,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유럽 유수의 무용단까지 서른 다섯의 신창호 씨는 ‘노코멘트’ 이전부터 세계 무용계가 주목하던 떠오르는 스타다. 그런 그에게서는 한국 최초로 많은 것들을 숨가쁘게 이뤄낸 사람답지 않게 어떤 긴장감도 예민함도 찾아보기 힘들다. 보아하니 그는 태생적으로 낙천적인 성품을


수천 명의 관객이 쳐다보는 무대 위에서 긴장은커녕 관객석의 표정을 살피는 여유라니. 기자가 놀라움으로 되묻자, 그는 어떤 무대도 두렵지 않으며 사실 연습 때보다도 무대에 올랐을 때가 더 편하다고 대답한다. 보통 첫무대는 많이 긴장되고, 그래서 제 기량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는 첫무대에서 연습 때보다 훨씬 더 편하고 잘 움직여지는 경험을 했다고. 그래서 무용수로서 자신의 길을 좀더 확신하게 되었고, 그렇게 소위 ‘무대 맛’을 보고나니 무대체질인 본인이 무용수의 길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저는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의 권유로 현대무용을 시작하긴 했지만 그리 탐탁지 않았죠. 왜냐면 저는 그 전까지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고 클라리넷으로 교내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거든요.“ 그를 무용의 길로 이끈 것은 발레를 전공했던 어머니의 강력한 권유였다. 신창호 씨가 현대무용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남자가 현대무용을 전공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것 같아 말씀을 듣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고. 발레리나였던 어머니로부터 재능을 물려받은 때문인지, 무용을 시작한지 얼마 안돼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고, 공식 오디션을 통해 스위스 상트갈렌 시립무용단, 영국 라반센터 트렌지션스 무용단 등에서 정단원으로 활동했다. “좀 더 넓은 무용세계를 접하려고 해외 무용단에서 활동했어요. 한국은 모든 걸 잘해야 안무가가 될 수 있는데 유럽은 좀 다르거든요.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있는 사람들이 안무가로 활동하죠. 무용단마다 안무가에 따라 색깔이 다른데, 저는 그 독특하고 다양한 무용을 배우고 싶었어요. 그래서 스위스, 영국, 독일 등 안무가를 찾아 다녔지요. 무용의 다양한 재료를 수집한 시기였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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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민의 EDUCATION COLUMN ART NOW IN NY


일러스트레이션 & 코믹스 Illustration & Comics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하면 그게 정확히 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관련 업종에 종 사하는 사람들도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이름의 특정 컴퓨터 프로그램을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스개 소 리로 “일러스트레이션 전공자”를 모집한다는 곳의 취업 면접에서 일러스트레이션 프로그램을 다루는 그래픽 디자이너 가 필요한 고용주와 그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직업을 찾는 구직자가 서로가 오해하고 있었음을 알았다고 하니, 우 리가 생활 속에서 자주 접하는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분야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는 듯 하다.


© Charles Dana Gibson


일러스트레이션 그리고 코믹스 일러스트레이션은 삽화나 도해라고도 불리며, 내용을 설명하거나 이해를 돕기 위해 출판물에 삽입된 이미지를 말한다. 따라서 내용을 가진 그림이나 예술 작품은 모두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현대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순수예술에서부터 실생활에 적 용되는 디자인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동하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은 우 리 생활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신문, 책, 잡지, 광고 등 이미지 를 활용해서 보는 이 로 하여금 보다 쉽게 이해하고 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곳 에는 어김없이 일러스 트레이션이 있다. 이 제는 분야도 다양해서 패션 디자인을 위한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의학 분야에서 사용되 는 의료 일러스트레이


© Norman Rockwell


션, 동화 삽화나 순수 미술 같은 창작 일러스트레이션도 있다. 미국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은 한때 '골드에이지'라고 불릴 정도로 흥 했었다. 당시는 사진 등의 기술이 보편화되기 전이라 부호들에게 많 은 돈을 받고 그림을 그려주었다. 특히 세계 1차 대전 전후에 쏟아 져 나온 엄청난 양의 출판물들의 이미지를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담 당했기에 작가들에 대한 대우나 사회적 지위가 상당히 좋았다. 그 러다가 사진 및 인쇄 기술이 발달하면서 일러스트레이션은 예전과 는 조금 다른 형태로 발전하였고, 이제는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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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더욱이 스마트폰처럼 손 안의 컴퓨 터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이미지 없이 사는 삶이란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코믹스는 무엇일까? 일러스트레이션과 코믹스에는 공통 점이 있다. 바로 내용 전달을 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대중 으로 하여금 보다 쉽고 빠르고 친근감 있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 록 돕는 창작물을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한다면, 이를 하나가 아닌 다수의 컷으로 제공하는 것을 코믹스라고 할 수 있다. 즉 코믹스는 이미지를 통해 내용의 이해를 단순히 돕는 것 을 넘어서, 여러 컷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바 탕으로 스토리를 풀어 나가는 장르이다. 코 믹스는 신문에서 처음 시작했으며, 만화책으 로 발전했다가 이제는 박물관이나 영화 스크 린에서까지 찾아볼 수 있게 됐다. 2D 애니 메이션이나 3D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코믹스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들이 많으며, 이제는 영화나 광고와 같은 영상물을 만들 때도 사전 스토리 보드를 제작하면서 일러스트레이션과 코믹스의 활 용이 필수이다.


© James Jean


서 예외가 아 니다. 일러스 트레이션과 코 믹스가 출판 물 또는 광고 와 직결되어 있고, 뉴욕은 출판사나 광 고회사가 집결 해 있는 곳인


만큼 일러스트레이션과 코믹스의 중심지인 것이다. 특히 일러스트레 이터들의 모임인 Society of Illustrators 건물이 맨하튼에 위치해 있으며, 수많은 출판∙


일러스트레이션 관련 모임이나 행사, 전시 등이 © Charles M. Schulz


일러스트레이션과 코믹스의 중심 뉴욕 다양한 예술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또는 경험하기 위해, 아니면 관 련 업종에 종사하기 위해 전세계의 수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은 오늘도 뉴욕을 찾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과 코믹스 역시 이 흐름에


매 시즌마다 뉴욕에서 열리고 있다. 코믹스 역시 미국에서 가장 큰 만화 관련 행사인 코믹콘이 뉴욕에서 매년 열리고 있으며, 스파이 더맨이나 엑스맨 등으로 유명한 만화제작 및 출판사 Marvel사도 맨하튼 미드타운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미래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이나 코미커들이 뉴욕으로 몰리는 또 하나 의 이유는 바로 뉴욕에 위치한 분야별 최고 대학들 때문이다. 특히 School of Visual Arts는 일러스트 레이션과 코믹스 분야에서 최초로 건립 된 학교인데,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졸업생들이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 을 하는 등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 다. 이 학교 출신들로는 Yuko Shi- mizu, James Jean, Marcos Chin 등이 있으며 이들은 작가로서의 활발 한 활동뿐 아니라 모교에서 후진 양성 에도 힘을 쏟고 있다. 또한 Parsons the New school for Design이나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그리고 Pratt Institute 등에서도 일 러스트레이션을 교육하고 있으며, 특


© Inhae Kim


히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의 경우는 세계 최고의 패션 학교인 Parsons 나 FIT가 유명하다.


뉴욕 내 일러스트레이션과 코믹스에 관한 키워드


Comic Con 미동부에서 열리는 가장 큰 대중문화행사로 한국의 코믹월 드나 일본의 코미케와 같이 만화나 영화 마니아들이 참가하 는 대규모 행사이다. 아마추어나 전문가뿐 아니라 Marvel Comics와 같은 거대 미국 만화 출판사들도 참가하며, 매년 10월이면 다양한 캐릭터로 분장한 수많은 사람들이 재빗센 터로 향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Society of Illustrators 미국 내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센터이며 뉴욕에서 내로라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은 모두 이곳의 회원이다. 학생 또는 전문 가를 대상으로 매년 공모전을 열며, 포럼이나 파티, 누드 드 로잉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School of Visual Arts 일러스트레이션과 코믹스에서 시작해 현재는 광고, 그래픽디 자인,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Parsons The New School for Design 패션디자인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학교인 만큼 패션 일러스 트레이션 분야가 유명하다. Marvel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으로 유명한 만화 제작 출판사이며 영 화와 애니메이션도 다루고 있다. 현재 만화책 제작부분인 Marvel Comics가 맨하튼에 위치해있다. Animazing 유명 작가의 애니메이션 원화나 모형을 판매하는 곳으로 스 누피, 닥터 수스, 마블스 등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유명 작품 의 원화를 직접 구입해 소장할 수 있다. http://www.animazing.com


아동학대와 방임 예방하기


필자가 일하는 아동상담클리닉에 내담하는 한인 부모님들의 상당수 는 아동학대와 방임 문제로 아동보호국에 신고가 되어 온 경우이다. 예 전에 비해서 인식이 많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한인 부모님들 이 아동학대나 방임의 가해자가 되어 당국에 체포되고 있다. 일단 아동 보호국(뉴욕주나 뉴저지주는 Child Protective Services, 뉴욕시는 Administration for Children’s Services)에 아동학대 및 방임사례가 접수되면 가해 부모는 경찰에 체포되고, 가정법원과 형사법원에 출두해 야 한다. 또한, 아이에 대한 부모의 친권이 일시적으로 중지되며 위탁양육 가정(Foster Home)에 보내지는 등의 처벌과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 다. 중요한 것은 부모 중 한 사람이 아이를 학대하게 되면 그걸 묵과한 다 른 부모도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성년자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님들은 무엇이 아동학대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또 조심해야 할 경우는 어떤 것들인지 잘 이해하고 대처하는 것이 바람 직할 것이다.


문화, 양육 스트레스가 한인을 비롯한 동양인 부모들의 아동학대 행위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동안 한인사회에서 발생한 아동학대 사건을 검토해보면 기존 동양인들 의 아동학대 및 방임에 대한 연구결과와 비슷한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 한 아빠는 아이가 10시간이 넘도록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것을 훈육하기 위 해 몽둥이로 아이의 엉덩이를 여섯 대 정도 때렸다. 아빠는 아이의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한 방법이었고 아이도 맞는 것에 동의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학교 상담 선생님이 이 사실을 알고는 아동보호국에 신고했다. 결국 아빠는 경찰에 체포 되고 아이는 위탁양육가정에 보내져 지내다가 입양을 가게 되었다. 부모는 아이 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 만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이에게 지속적인 위험을 가져오고 또 아이 의 이익에 위반한다면 아동보호국은 입양을 주선하기도 한다.


▶ 한 엄마는 아이만 단 둘이 있는 집에서 술에 취해 누워있다가 이웃의 신고로 체 포되었다. 어린 아이가 엄마가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고 그 소리를 들은 이웃 주민이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이다. 엄마는 평소 음주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는데 어느 모임에 갔다가 술을 주량보다 많이 마시게 되어 몸과 마 음을 가눌 수 없는 상태였다. 영문도 모른 채 아이 엄마는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 감되었고 결국 재판이 진행되는 4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 고 아이를 만날 수도 없었다.


▶ 정부기관에 근무하는 한 아빠는 미성년 자녀가 보는 앞에서 부부싸움을 크게 했고, 감정이 격한 나머지 아내를 몇 차례 구타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아이가 학교 글쓰기 시간에 “부모가 너무 싸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내용을 글에 담았 다. 결국 학교 담임선생님이 이 글을 읽고는 아동보호국에 신고를 하게 되었다. 현재 아이의 엄마와 아빠는 부부상담, 자녀양육과정, 분노조절과정 등의 필수 상담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아동보호국에서 아이가 심각한 위험에 놓여있다고 판단하지 않아서 위탁양육가정으로 보내지는 않았다.


글 Inhae Kim


School of Visual Arts를 졸업하고 Parsons the New School for Design에 재학중인 그녀는 현재 뉴욕에서 Artist로 활동 중이다. 어릴 때부터 문화예술기 획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 중이다.


우선 아동학대란 18세 이하의 미성년 자녀에게 몸에 가벼운 멍이 들게 하 는 정도에서부터 심각한 골절 또는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의 심각한 신체 적 폭력 혹은 양육목적의 심한 체벌, 아동을 성적으로 이용하는 일련의 행위, 그리고 아동에게 과도하게 비판적이며 위협적인 언행을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반면, 아동방임은 18세 이하의 미성년 자녀에게 건강한 성장과 발달을 위해 필요한 돌봄을 적절히 제공하지 않아서 아이에게 정 신적 혹은 신체적 위험을 끼칠 수 있는 행위, 즉 영아를 집에 혼자 두거나, 병원에 데려가지 않거나,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한인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동학대 사건들은 주로 양육목적의 체벌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한인을 비롯한 동양인 부모들은 성적 인 학대나 감정적 학대, 아동방임 보다는 체벌과 같은 신체적 학대로 인해 당국에 신고되는 비율이 타 인종 부모들에 비해서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연구결과를 종합해보면 과거에 부모에게 체벌을 비롯한 신체적 학대를 당 한 경우, 체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양육방식, 부모의 권위를 존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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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고등학생 줄리는 사춘기 방황을 심하게 겪고 있다. 친구 들과 어울려 다니며 학교 수업을 빼먹기 일쑤인데, 어느 날은 엄마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친구 집에서 며칠을 지내다 집에 들어왔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엄마 는 줄리의 얼굴을 몇 대 때렸고 아이도 엄마의 머리채를 붙잡고 서로 뒤엉켜 싸 우기 시작했다. 이 소란을 들은 이웃의 신고로 엄마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아이는 위탁양육가정으로 보내졌다. 엄마는 아동보호국에서 제시하는 상담교육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줄리를 다시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 중년의 김모 씨는 평소 술을 즐기는 편이다. 어느 날 모임에 갔다가 술을 마신 후 미성년 자녀 두 명을 차에 태우고 집에 가던 길에 경찰의 검문에 단속되었다. 음 주운전도 문제였지만 술을 마신 상태에서 미성년 자녀를 태운 것이 화근이었다. 바로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형사법원과 가정법원의 소환을 받게 되었다. 현재 알 코올남용 치료와 부모양육훈련과정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있으며 운전면허가 중 지되어 일상생활에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사고라도 났다면 더 심각한 형사적 책임을 질 수 있었고 아이들의 신상에도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 된 한 엄마는 한인 슈퍼마켓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자 고 있는 2살배기 아이를 차 안에 두고는 잠시 길 건너 물건을 사러 갔다. 그 사 이 아이가 깨어 울음을 터뜨렸고 지나가던 미국 할머니가 경찰에 신고해서 엄마


는 구치소에 감금되었다. 한겨울인데도 자동차 시동을 끄고 문을 잠가놓은 상태 였다. 미국에서는 어린 아이를 차 안에 혼자 두면 엄격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을 잘 몰랐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가 자고 있으니까 잠깐 갔다 오는 것은 괜찮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위에서 열거한 사건 외에도 다양한 사례들이 많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대개의 경우에는 심각한 아동학대나 방임보다는 미국의 법과 제도에 대한 이해 부족, 안일한 생각, 부부싸움, 음주, 훈육목적의 신체적 체벌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국에서는 한인을 비롯한 동양인들의 아동학대 신고 비율이 타 인종에 비해서 매우 낮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는 실제 아동학대 발생비율이 낮은 경우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집안 일을 밖에 잘 알리지 않는 문화나 타 인의 개입을 꺼려하는 가족주의 성향, 신분 문제나 법적인 불이익을 당할 우려 등으로 아동학대가 제대로 신고되지 않기 때문에 아동학대 비율이 낮게 나오는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즉,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아 동들이 아동학대와 방임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동학대와 방임은 아동은 물론, 가해 부모와 가족 전체적으로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특히, 아동학대와 방임에 노출된 아이들은 언 어, 인지, 감정 등의 발달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증가한다. 또한 심리정 신적인 문제, 학업부진, 비행 및 행동장애, 대인관계상의 문제, 폭력의 반 복 현상 (즉, 폭력을 경험한 아이는 자라서 폭력적인 성인이 된다) 등의 부 작용이 발생한다. 가해 부모는 형사법적인 책임, 막대한 변호사 비용과


상담 비용, 심리적 문 제, 자녀-부모 간의 관계 문제 등을 경험 할 수가 있다. 폭력을 당한 아이가 가해 부 모와 ‘친밀한 부모-자 녀 관계’를 유지하긴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한인사회에 만 연되어 있는 아동학대와 방임에 대해 경각심을 가 질 필요가 있다. 아이가 훈육이 필요한 경우에는 더 효과적이고 비폭력적 인 훈육기술을 활용할 필


요가 있을 것이다. 아동학대나 방임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사법당국과 아 동보호국의 명령을 잘 따르고 법률대리인을 통해서 사건의 원만한 해결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글 윤성민 현, 윤성민 심리건강센터 소장


현, 뉴욕차일드센터 아시안클리닉 부실장 www.mindwellbeing.com


자녀교육 및 상담문의: 646-733-7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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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LTH 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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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AM은 미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약 200 여명의 한국인 의사들이 모여 네트워킹 및 커뮤니티를 제공하는


그룹으로 맘앤아이를 통해 각 전문 분야의 다양한 건강 정보를 제공합니다. AKAM www.akam.org


유방암에 대한 오해와 진실


유방암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질병 중 하나입니다. 미국에서는 매년 20만 명 이상 의 여성들이 유방암 진단을 받고 있으며, 그 중 4만 명 이상이 유방암으로 사망할 만큼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한 질병입니다. 평생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여덟 명 중 하나일 정도로 여성에겐 흔한 암이며, 현대 의학이 발전했음에도 여전히 36명 중 한 명 이 유방암으로 사망할 수 있다는 통계는 유방암이 절대 남의 이야기일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다행히 최근 치료법의 발달로 사 망률은 줄어드는 추세이며, 현재 미국에만도 250만 명 이상의 유방암 환자들이 생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유방암인 만큼 정확한 지식과 예방적 진찰을 위해 유방암에 대한 다음의 몇 가지 오해에 대해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해 유방에 혹이 만져지면 반드시 암이다.


진실 혹이라고 해서 반드시 암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혹이 있는 10명의 환자들 중 8명은 암이 아닌 양성 종양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암일 확률도 존재하므로 유방 자가검사를 통해 유방에 혹이 느껴지면 즉시 전문의의 소견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해 가족 중에 유방암 환자가 있으면 암에 걸린다.


진실 가족 중 유방암 환자가 있으면 가족력에 따라 당연히 암 발생 확률이 높아지지만 반드시 암에 걸린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할머 니, 어머니, 또는 친자매 중에 유방암이 있는 경우 유방암 검사와 유방촬영(mammogram)을 일반인들보다 약 10년 정도 빠른 35 세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해 겨드랑이에 땀 억제제인 데오드란트(Deodorants)를 사 용하면 유방암에 걸릴 수 있다.


진실 미국 연방정부 암센터의 보고에 의하면 데오드란트의 사용과 유방암 사이에는 근본적인 증거가 없다고 발표되었습니다.


오해 롱아일랜드나 버겐카운티에 살면 유방암에 더 걸릴 수 있다.


진실 롱아일랜드나 버겐카운티 주민들의 높은 유방암에 대한 인식 때문에 유방암의 초기 발견 확률이 높을 수는 있지만, 뉴욕 근교 어 떤 특정 지역의 물이나 공기, 농약 사용 등이 암을 더 많이 유발한 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오해 유방암 검사 시 쏘이는 방사선 때문에 암에 걸릴 수 있다.


진실 유방암 검사 시 노출되는 방사선의 양은 안전하며, 암을 초기 에 발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므로 유방암 검사는 반드시 해 야 합니다.


오해 유방암은 전염될 수 있다.


Funsters Play Group


Age (12개월 -36개월) Play Time (90min.)


Funsters with Mommy


Age (24 개월부터) 수업소요시간 (45 min.)


Little Funsters


Age (36개월부터) 수업소요시간 (1 hr)


Funsters Artist & Chef


Age (Little Funsters 교육을 마친 친구들 또는 9yrs-12yrs) I 수업소요시간 (1 hr)


December 2012 EDUCATION 43


진실 암은 환자의 접촉으로 전염될 수 없습니다. 암은 본인의 몸 안에 생긴 세포 이상으로 발병하는 것이므로 전염을 우려해 유방암 환자를 멀리 할 필요는 없습니다.


72 CLINIC January 2013 글 June J. Lee, M.D. Director of Breast Health Center


St. Catherine of Siena Medical Center 번역 Dr. Benjamin Choi


그렇다면 유방암 초기 발견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1) 20세 이후부터는 유방 자가검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2) 20세에서 39세까지는 1~2년에 한번씩 산부인과 진찰이 필요합니다. 3) 40세 이상은 매년 유방촬영을 하고, 유방암 검사도 매년 실시합니다. 4) 지방 섭취를 줄이고 운동량을 늘려야 합니다. 5) 담배를 끊고 술은 적당량으로 줄여야 합니다.


3년 전 미 연방정부 예방치료연구회(USPSTF)가 유방촬영은 40세가 아닌 50세부터 74세까지만 하라는 임상 추천문을 발표 해 큰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 발표의 원인은 일부 연구논문의 결 과 검사를 받은 전체 숫자에 대한 유방암 환자의 비율이 40세부 터 50세까지가 50세 이상과 비교했을 때보다 더 낮다는 점 때문 이었습니다. 하지만 암 발견 확률이 1,339명 중 한 명(50세 이 상)이나 1,904명 중 한 명(40세 이상)이라는 차이에서 보듯 결 국 유방암 검사는 40세 이상 여성이면 누구나 해야 하는 것이 맞 습니다. 유방암의 85% 이상이 유전적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 면 간단한 유방촬영은 초기에 암을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검사 입니다. 따라서 주변의 가족이나 이웃에게도 유방암 검사를 적 극 권유하시기 바랍니다.


오해 남자는 유방암에 걸릴 수 없다.


진실 극히 드물지만 연간 약 2,200명의 남성들도 유방암에 걸리 며, 그 중 400명 이상이 사망할 정도로 남성의 유방암도 치명적입 니다. 흔히 남성들의 경우 유방암이 늦게 발견되면서 더욱 치명적 일 수 있기 때문에 남성들도 목욕 시 가끔 가슴 부위를 만져 종양이 잡히는지 검사해야 합니다.


16 PEOPLE January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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